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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인은 가수라기보다는 시인이다. 말이 가지고 있는 운율과 멜로디가 그대로 살아있다. 그의 1집 앨범은 음악하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이 곡은 '새벽까페 사람들' 이라는 미완의 뮤지컬에 실릴, 음악하는 이들을 다룬 노래다.

그는 음악을 한다기보다는, 시를 복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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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der
작년이라고 부르기 뭐할 정도로 가까운 과거. 언제나 그렇듯이 쉽지 않았고, 운이 좋았다. 인생에서 견디기 어려운 몇 가지 경험을 했고, 새로운 삶을 맞았다. 2011년 어느날부터인가는 자꾸 관계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달라진다 언제나 인생은. 흐르는 물같은 그 변화를 거부할 수 있는 건 아님을 알기에, 물길을 잘 내는 것이 장년의 삶이 필요로 하는 지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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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der
오래전의 사람들. 유독 나는 과거의 사람과 단절되어 있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겹겹이 밀려드는 오늘의 사람들과 오늘의 말들 속에 지나간 사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지곤 한다. 12월에는 그 오래전 사람들을 만날 일들이 많다. 단순한 송년회 망년회를 넘어선, 갈라져버린 길과 흩어져간 꿈과 두리뭉실해진 추억의 촉감들을 다시 마주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한때 가슴에 자리했던 것들이 시간과 함께 훌쩍 떠나간 빈자리에 바람이 들어참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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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der
한 사람이 사건과 사물을 마주하는 것까지는 사유의 영역이다.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지만 사유만 하는 동물이 아니므로, 그것이 논리적인 필연은 아닐지라도 반드시 사유는 소통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활동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적인 형식이다.

이때 사유하고소통하는 방식에 필요한것이 보편적인 교양이다. 필요성에 대해 '왜?' 라는 질문을 먼더 건다면, 그건 당연히 '자기만족' 이다. 보편적인 교양의 폭과 활용이 넓을수록 스스로가 세계와 교류하는 방식이 보다 적합하게, 보다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으며, 이는 개인에게는 더욱 다양한 만족감과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조금 더 좁은 의미로 접근한다면, 이러한 보편적인 교양을 통해 구성되는 풍성한 수사와 비유, 더욱 원활해지는 의사소통과 정치소통에서의 주도권 확보는 먹고 사는 문제, 특히 집단으로 구성된 곳에서 밥벌이를 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실 매우 단순한 원리로부터 출발한다. 물리학자들은 심지어 그 세계의 시초까지도 나노초 단위로 추적해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어떤 경우에도 우주가 성립한 기초적인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자아가 살아가는 세계의 외연이고, 그 외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러한 내용들을 폭넓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그 폭넓음은 상당히 유용한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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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외로운 시절이었어.

애써 과거형을 던지지만 나는 지금도외롭고 앞으로도 외롭다. 삶에 엉키는 순간부터가 외로운 것이다. 외로움은 갈망하는 내가 내안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그 갈망때문에 외롭다는 사실은 알아도 결국 제자리다.

삶과 죽음, 최근 내내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죽음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겠는가?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닌 사람은 죽음조차도 힘들 것이다. 숨 한번 쉬기도 어렵다 그런 생각 속에선.

애써 마음속 깊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살려고 했다. 하지만 두렵고 우습다. 언제까지 이렇게이렇게

...

간만에 블로그를 긁었다.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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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엔 비..

lyrics 2011/04/24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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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시작은 힘들었다. 전쟁통에 이북에서 휩쓸려 내려와 강원도 산구석 탄광촌에 정착한 그의 부모는 일자무식에 가난했고, 그저 탄광에서 탄을 캐어 대가족의 생계를 이을 뿐이었다. 그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첩첩산중에서 탄캐느니 도시로 나가 뭔가 해보겠다고들 했고, 그 식구들도 그렇게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맨몸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그는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나와 거리를 헤매였다. 무식하고 성질 더러워서 가족으로부터도 냉대받던 그는 어찌어찌 작은 외국 공장에 취직했고, 거기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가재도구 따위도 없었다. 혼수라고 아내가 해온 장롱은 단칸방에 다 들어가질 못해서 아래위를 톱으로 잘라내는 수모도 치러야 했다.

그나마도 다 털렸다. 연탄가스가 새어 나와 어린 아들은 죽을 뻔 했고, 식구가 늘면서 좀더 벌어보겠다고 회사를 옮긴 뒤 자리잡은 새 동네에선 도둑을 맞았다. 이번엔 세 식구가 다 수면가스를 맞았다. 다시 또 빈털터리, 식구들은 가난한 그를 대놓고 무시했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맺힌 한은 독기로 자라났다. 그는 평생 놀 줄을 몰랐다. '공돌이' 로 보낸 청춘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회의 벽을 느낀 그는, 옮긴 회사에서는 짬이 날때마다 공부에 매달렸다. 이틀에 한번 꼴로 밤샘 야근을 하는 직종이었지만, 그는 주말엔 앉은뱅이 책상 하나를 놓고 공부했다. 영어가 필요하다길래 영어에 매달렸고, 대학 학력이 필요하다기에 야간대학을 다녀 학위를 땄다. 기술자격이 필요하다길래 기술공부를 했고, 회사에서 애먼 데다 발령을 내자, 인생에 위기를 느끼고 자영업을 위한 자격 공부를 했다.

회사를 나와서 시작한 삶에서도 그는 놀거나 쉬는 법을 몰랐다. 동네에서 가게 얻어 자영업 하는 사람의 1년 휴일은 딱 여름휴가 4일이 전부였다. 그에게 일요일이란 그저 아침잠 두 시간 더자는 게 전부였다. 그의 출근시간은 6시반, 그시간에 아무도 없는 가게에 나가 그는 가게 앞 거리를 청소하고, 가게를 치웠다. 그렇게 시작한 하루는 아홉 시가 넘어야 셔터 문을 내리는 것으로 마감되곤 했다.

아들이 공부깨나 하자 그 생활은 더욱 빠르게 돌았다. 못 배운게 한이 된 그에게 아마도 자식들의 학업은 인생에서 대단히 무거운 개념이었을 것이다. 아들의 고3시절 내내 그는 아들과 함께 출퇴근했다. 아들이 일어나는 새벽 5시에 같이 일어났고, 아들을 학교에 태워 보낸 뒤 가게로 나갔다. 물론 그래도 출근시간은 여전히 7시였다. 일이 끝나면 아들의 자율학습이 끝나는 10시반에 맞춰 아들의 학교 앞으로 갔다. 두 사람이 집에 오는 시간은 열한시. 그렇게 또 1년을 보냈다.

아들은 대학에 갔지만,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변해갔다. 성장의 단물을 빨아먹은 세대인 아들은 아버지와는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법대에 가서 법관이 되기를 바랐지만 거부했고, 외교관이나 공무원이 되기라도 바랐지만 거부했다. 아들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책을 쓰겠다느니, 공부를 하겠다느니. 그럼 교수를 하라고 했다. 그것도 싫다고 했다. 아버지는 권력있는 자리에 아들이 서길 바랐고, 아들은 하필 그 권력을 거부했다. 그는 실망했고, 또 기뻐했다. 그의 뜻과 완전히 다르게 가는 아들의 길을 보며 입맛을 다셨지만, 한편으론 모든 가치가 무너지는 시대에 그 턱없는 가치와 도덕 같은 것에 매달리는 몇 안되는 고고한 존재가 되어버린 아들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뿌듯해 했다.

그는 계속 놀지 않았다. 아니 돌이켜보건대 그는 놀거나 쉬는 법을 아예 몰랐다. 어릴 때부터 뼛속까지 박힌 가난과 힘없음에 의한 강박은 평생 그를 짓눌렀다. 경제성장과 개발의 붐을 타고 그는 상당한 수준의 풍요에 다다랐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계속 일을 했고, 계속 누군가와 싸웠고, 계속 뭔가를 모으고자 했다. 여전히 그의 출근 시간은 7시였다. 세상이 주5일이 되어도 그는 7시였다.

그리고 아 이제 좀 쉬어볼까 하는 순간, 병마가 그를 덮쳤다. 그는 다시 출퇴근했다. 병원에 매일 아침 7시까지 나가서 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1년. 가망없어 보이는 차도에도 불구하고 1년을 꼬박 다녔다. 그리고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던 손주의 돌잔치가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아 그는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아들은 운다. 생전 그리 사이가 좋지도 않았고 다시금 머리로 되새겨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운다. 안녕 아버지..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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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der
인간에겐 생각이라는 도구가 있다. 생각이라는 건 우리의 오감으로 느껴볼 수 없는, 말그대로 형태의 범주를 벗어난 쪽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형태를 벗어났지만 분명 존재하고 정의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형形 이상의 개념에 대한 공부라는 뜻이지.

인간이 만든 수많은 개념들 중 이른바 가치라고 불리는 것들은 대개 형이상학의 범주에 들어 있다. 단순히 배고픈 이에게 주어지는 빵이 갖는 가치같은거 말고, 소위 윤리적 가치라던가 도덕적 가치로 불리는 개념들 말이다. 정의, 진실, 용기, 배려, 사랑, 이런거 말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과학의 범주에는 들지 못한다. 과학적으로 형이상학적 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명백한 정의가 필요한데, 이들은 과학의 범주에서 보편적 정의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개 저러한 가치들에는 정의 대신 지칭과 비유가 따른다. '사랑은 꿈결같아서' 뭐 대충 이런 식의 비유들로 세간에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그렇게 흩뿌려진 개념들을 머릿속에서 조합하면서 개념을 형성한다.

재미있는 건, 정말 정의롭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정의로움이라는 가치가 무얼 의미하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거다. 일일이 말로 풀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과학의 범주가 아니기에 일반론으로 풀 수 없다) 적어도 이러한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연관개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가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가 발현되는 지점이다. 말그대로 개념으로만 머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 정직이 무엇인지를 혹여 누가 100% 완벽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쳐도, 그건 말그대로 형이상학의 범주에만 머무를 뿐이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형의 세계에 정직은 개념을 정의한다고 내려오지 않는다.

진정한 가치라는 건, 형이상학의 영역에 머무르는 가치를 우리 사는 세계로 끌어내릴 때 나타난다. 평소 아무리 정의로운 척 떠들어도, 평소 아무리 기품있는 척 이야기해도 그건 개념에 머무를 뿐 그 사람을 그 가치에 맞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가치가 현실에 발현하는 순간은 매우 고통스럽고 어려운 순간들 뿐이다. 정직이 우리 세계에 드러나기 위해선, 정직하지 않은 사건과 상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치라는 건 '그렇지 않은' 상황을 딛고 서면서 현실화된다. 세상에 불의가 없다면 의는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 '의' 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형이상학으로 상정하고, 그것이 실제 발현하기를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의' 를 세상에 내보이기 위한 과정은, 의롭지 않은 세상에 홀로 맞서는 상황일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참혹한지 역사가 증명한다. 개념뿐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삶의 기본조건을 내던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그렇게 자기 목숨을, 자기의 모든 우주를 내던졌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세상은 어떠한가. 의로운 한 개인이 목숨을 던져도 구하기 힘든 의로움이라는 건 현실의 세계 있는 그대로이다. 그렇게 형이상학적 가치는 우리 사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젊은 날의 이상과 야망이 살면서, 나이들면서 점점 '현실과의 타협' 을 통해 어그러져 간다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한번도 이상이 현실에 적용된 적 없었으면서도 그들은 자신이 이상과 멀어진 현실을 가리켜 '현실과 타협' 했다고 주장한다. 아니지. 애초에 이상은 자아와 동떨어져 있었다. 다만 나이들어가면서 그걸 깨달을 뿐이다.

높고 고고한 이상을 바라보면서 살던지,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끌어안으면서 살 것인지는 아무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문제다. 다만 스스로의 삶을 고민하면서 답이 없더라도 고민만으로도 풍족해지는 주제들이 있고, 그 주제 중 대표적인 것이 이상과 현실에 대한 고민이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너도 마찬가지인 것은, 너와 내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엮여있기 때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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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der
영화시나리오작가 한 명이 굶어 죽었다. 그래, 한쪽에서 돼지 수백만마리를 산채로 땅에 묻는 와중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은 나온다. 예술가가 배고프다는 건 유사이래 진부할 정도로 반복되어 온 과정인데, 다만 마치 그게 슈베르트나 되는 시절에서나 익숙했던 이야기인지라 동시대 동공간에서 나온 뉴스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얼마전의 달빛요정 사건까지도 겹친다면...

창작이라는 건 사실 일반적인 생산활동과 동떨어진 개념이다. 기업에서 월급받아 일하면서 뭔가 대단한 프로젝트를 만들어 낸 걸 가지고 우리가 감동을 먹거나 예술이라 칭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예술이란 건 직접적인 생산활동 외에서 이뤄지는 작품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초기의 예술은 그래서 전문직이 따로 없었다. 먹고사는 일상의 사람들이 남는 시간에 여가의 개념으로 했던 게 예술이었지. 그 예술은 그런데 일부 재능에 의해, 혹은 문화적 선택에 의해 전문직으로 거듭나는데, 무당이 그렇고, 광대가 그렇다. 그리고 이런 개념들은 산업화, 복제가능한 컨텐츠 생산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문적 산업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창작을 통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고전적 의미의 '예술은 배고픈 직업' 은 개념을 달리 해야 했다. 이젠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이 열렸기 때문이다. 책으로, 영화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창작자들은 오히려 떼돈을 벌기 시작했고, 자본은 문화산업에 주목하고 투자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그리 먼 기억이 아니다. 김영삼 시절의 신지식인 1호가 누구였는지 기억하는가? '쥬라기공원 1편 = 현대자동차 50만대' 의 개념을 앞세우며 등장한, '용가리' 의 감독 심형래였다.

문제는 그런 문화산업의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창작자는 여전히 배고프다는 것이다. 왜냐고? 애초에 언급했지 않는가, 창작, 예술이라는 건 애시당초 개념이 생산활동과 떨어진 산출물이라고. 인디 예술계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어떤 예술이건간에 그게 인기가 좋아져서 돈이 되는 상황이 오면, 예술가들은 고민한다. 먹고살기 위해 만드는 창작이 과연 예술인가. 그 본질론에 휩싸이고, 고민 끝에 예술가는 다시 거리로 나선다. 그렇기에 애초에 설정부터가 예술은 배고픈 일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생산과 따로 떨어질 수 밖에 없근 것이 창작이고 예술이라면,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가난할 수 밖에 없다. 생산과 동떨어진 창작이 유지되는 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이들이 아마추어 취미활동으로 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적어도 그 예술가가 속한 사회가 그 예술가를 먹여살려 주는 방식이다. 앞서 원시사회의 무당 이야기를 언급한 건 바로 이게 후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얻어먹는 방식이 일종의 정치적 현혹에 가깝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무당의 예술은 사회의 공동생산이 그의 입까지도 잉여생산을 통해 먹여살려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추어 예술가야 먹고살일이 해결되니, 전업 예술가 이야기가 중요하다. 적어도 지금의 사회에서 이러한 전업 예술가는 살아남을 수 없다. 우리 사회는 명백히 효율과 수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니 당장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쓸데없는짓 하지마!' 가 일상인데 어떻게 예술이 나오나? 예술의 본질은 '쓸데없는 짓' 이다. 정말 하등 쓸 데, usability가 없는 게 예술이다. 그런데 쓸데없는 짓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까? 그건 생산적 관점에서나 그렇지. 쓸데없다고 해서 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영화시나리오작가가 무려 '굶어' 죽은 사건은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수익을 만드는 것 외의 모든 것을 '쓸 데 없는 것' 으로 치부하고, 그런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혀를 찰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잉여들인 예술가들에게 나눠줄 빵 따위는 없는 것이지. 그냥 여기서의 아름다움이란 건, 누가 더 빵 많이 갖느냐, 누가 더 빵 많이 쌓아뒀느냐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존나아름다워,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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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dder
...모 게시판을 구경하다가 이상한 글을 하나 봤는데, 자기가 만난 사람에 대한 인상을 적은 글이었다. 놀랍게도 글쓴이는 자기가 만난 사람에 대한 첫 묘사를 '기품있다' 라는 단어를 사용해 시도하는데, 그 기품이란 게 다름아니라 '좋은 직장에서 좋은 일을' 하기 때문이라는 부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좋은 직업에서 나오는 기품이라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걸까?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볼 때, 나는 이른바 선망하는 직업에서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그런 기품을 느껴 본 바가 없다. 물론 글쓴이가 말하는 기품의 근거는 깨끗한 수트와 헤어스타일, 깔끔한 액세서리와 말투 같은 것이었는데, 글쎄 뭐 그런게 기품을 말하는 거라면야 할말이 없지만, 그렇게 차려입고 말하는 사람이 현대산업개발 회장마냥 '인문학 한줄 배운 애들이 술자리가서 노래가락 한곡조 뽑으면 영업에 도움이 된다' 고 말하는 걸 보고서도 기품있다고 할 지는 모르겠다.

기품이라는 건 그런게 아니다. 그는 단어를 잘못 알고 쓰는 거겠지. 내가 느낀 기품이라는 건, 그러니까.. 그래. 홍대 앞에서 가수하고 있는 내 대학 동기가 하나 있다. 그녀석은 평소에 그리 말이 많거나 하진 않았는데, 그 조용한 아이가 한 마디 하거나 한 줄 쓰면 뭐랄까 함부로 대꾸하기 어려운 그런 게 있었다. 난 그런걸 기품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기품을 갖고 싶어한다.

사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기품없는건 인기좋은 직업들 아닌가? 검사는 상납받아 떡치러 다니고, 대기업 회장은 사람을 몽둥이로 패질 않나, 국회의원이란 작자들은 청소 아줌마한테 한번을 고개숙여 인사하는 법을 못 봤고, 어디 좀 돈되는 기업에서 난다긴다 하는 것들은 첨보는 사람에게 반말 찍찍거리길 예사로 하는데 도대체 무슨 기품을 찾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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